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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춘천 효자동, 시간을 볶아 내는 곳

    ― 로스터리 카페 ‘시실리아 커피로스팅 하우스’ 깊이 탐방기

    “나는 시간을 잃어버리고, 이 마을(里)에서 나를(我) 찾는다.”
    ― 카페 이름 時失里我(시실리아) 에 담긴 뜻


    1. 강원대 후문 오르막에서 만나는 30년 내공

    춘천시 효자동, 강원대학교 후문 횡단보도를 건너 왼편 오르막길을 따라 몇 걸음이면 오래된 간판 하나가 눈에 띈다. ‘시실리아’. 화려한 네온 대신 고풍스러운 서체가, 큰 유리창 대신 나무문이 손님을 맞이한다. 1993년 서울 신림동에서 로스팅 카페 1세대로 문을 열고, 2008년 춘천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30여 년 동안 같은 철학을 고수해 온 곳이다.


    2. 이름에 깃든 언어유희, 그리고 로스터의 고집

    카페를 연 이상덕 대표는 시칠리아(Sicilia)의 발음을 차용하되, 한자 ‘時失里我’를 붙여 “시간을 잃어버리고 마을에서 나를 찾는다”는 시처럼 변주했다. 여행지가 아닌 카페가 휴식의 목적지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이름처럼 그는 ‘시간’을 볶아 내듯 긴 로스팅 곡선을 즐긴다. 생두를 1차·2차 두 번에 걸쳐 핸드픽(결점두 수작업 선별)하고, 볶은 뒤 다시 선별해 잡미를 걷어낸다.

    대표에게 “로스팅 비법”을 묻자 돌아온 대답은 담백했다.

    “원두가 가진 고유한 특성을 드러나게 하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3. ‘자작 로스터기’로 빚어낸 90년대의 열정

    90년대 초, 커피 전문 서적은커녕 로스터기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는 뻥튀기 기계 원리를 참고해 금속 드럼과 열풍 장치를 직접 제작하면서 국내 로스터리 1세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로스터를 만들고 부수기를 반복하던 시간은 “배울 데도 가르쳐 줄 사람도 없었던” 개척자의 외로움이었다고 회고한다.


    4. 두 층으로 나뉜 공간, 커피 내음이 흐르는 서재

    • 1층 : 다섯 테이블 남짓한 작은 홀이지만, 나무 장식장과 원목 테이블이 내뿜는 따스함이 있다. 바에서는 드립 세팅이 늘 놓여 있고, 종일 로스팅 향이 잦아들지 않는다.
    • 2층 : 한때 바리스타 교육장이던 이곳은 지금도 원형 로스터가 돌아가는 ‘작업실 겸 살롱’이다. 커피인들이 흘려놓고 간 노트와 오래된 드립 포트가 선반을 메운다. 촘촘한 커피 책들 사이에서 커피 한 잔과 책 한 권의 오후를 보내기 좋다.

    5. 메뉴판보다 넓은 향미 스펙트럼

    메뉴 가격 테이스팅 포인트

    아메리카노 2,500 ~ 3,500원 밸런스형 하우스 블렌드
    카페라떼 3,500원 우유·에스프레소 1:1로, 고소함 강조
    싱글오리진 드립 5,000 ~ 6,000원 콜롬비아 수프리모·에티오피아 예가체프 등
    예멘 모카 마타리 6,000원 말린 대추·초콜릿·삼나무 향, ‘고흐가 사랑한 커피’
    더치커피(병) 8,000원 14시간 콜드브루, 묵직한 단맛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역시 싱글오리진 핸드드립. 주문하면 대표가 직접 칼리타 웨이브 드립퍼에 30 초 ‘뜸들이기’ → 세 번 나누어 추출 → 250 ㎖ 완성. 물줄기를 끊지 않는 ‘연속 주입’ 덕에 산미와 단맛이 또렷이 분리된다.


    6. ‘무게보다 부피’ — 시실리아만의 레시피

    대표는 “원두는 볶을수록 가벼워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드립을 계량할 때 무게가 아닌 부피를 기준으로 삼는다. 예를 들어 라이트 로스트 원두는 스푼 한 컵에 12 g, 다크 로스트는 10 g으로 계산해 언제나 동일한 농도를 유지한다. 작지만 집요한 원칙이 30년 단골을 만든 셈이다.


    7. 커피가 주는 ‘시간의 소멸감’

    시실리아를 찾은 손님들은 종종 ‘시간을 잃어버렸다’고 표현한다. 창가 자리에 앉아 효자동 언덕길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시계 초침보다 커피 향의 흐름이 더 느리게 다가온다. **“마을에서 나를 찾는다”**는 상호의 뜻이 가장 잘 증명되는 순간이다.


    8. 로스터리 1세대가 보는 한국 커피 씬

    대표는 요즘 부쩍 스페셜티 열풍 속에서 커피가 “정보가 아니라 경험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에티오피아 90+ 점, 브라질 87 점이라는 숫자보다
    그 한 잔이 내 하루에 남기는 체험이 중요하죠.”

    결점두 한 알이 맛을 망칠 수 있다는 그의 고집은, ‘경험의 극대화’를 위한 미니멀리즘이다.


    9. 시실리아에서만 들을 수 있는 커피 이야기

    1. 예멘 모카 마타리 : 빈센트 반 고흐가 즐겼다고 전해지는 원두. 드립 시 꽃향 → 말린 과일의 단맛 → 다크초콜릿 뉘앙스로 이어지는 3단 변주가 일품이다.
    2. 자작 로스터 이야기 : 뻥튀기 기계 모티프, 국내 최초 열풍 드럼형 수제 로스터.
    3. 핸드픽 노하우 : 볶기 전·후 두 차례 선별, ‘불량 두 알이 한 잔을 망친다’는 신념.

    10. 방문 가이드

    항목 내용

    주소 강원도 춘천시 서부대성로 227번길 22 / 효자동 629-14
    전화 070-7768-9255
    영업 월–금 10:00 – 20:00 / 토 12:00 – 18:00, 일요일 휴무
    주차 전용 주차장 없음. 인근 골목 주차 또는 강원대 공영주차장 이용
    원두 판매 200 g 단위, 1 kg 이상 20 % 할인
    추천 시간 학기 중 평일 오전 → 한적, 시험 기간 오후 → 스터디족 몰림

    11. 한 잔으로 완성되는 ‘시간의 미학’

    바쁜 마음으로 올라온 효자동 언덕에서, 시실리아의 드립 커피는 시간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선물한다. 추출구에서 뚝뚝 떨어지는 갈색 물방울, 드립포트에서 올라오는 증기,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갈색 노트 한 권—모두가 ‘시간’이라는 재료로 잘 볶여 있다.

    만약 춘천 여행 일정에 닭갈비·소양강 스카이워크만 넣어두었다면, 그 사이 빈 칸에 시실리아 커피 한 잔을 채워 넣어 보자. 당신도 어느새 “시를 잃고, 나를 찾는” 손님이 되어 있을 것이다.


    “10 년 뒤, 20 년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길 바라요.
    그때 다시 찾아와도 같은 맛, 같은 이름이면 좋겠죠.”

    ― 이상덕 대표

    카페 문을 나서는 순간, 잦아들었던 초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 시간 속에서, 손에 남은 커피 향이 길게 여운을 드리운다. 효자동을 스치는 바람처럼, 볶은 원두의 향처럼. 당신의 춘천이 더욱 깊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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